이노우에 마사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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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노우에 마사쓰네는 에도 시대 중기의 인물로, 히타치국 가사마 번의 다이묘 이노우에 마사유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737년 도쿠가와 요시무네 쇼군을 알현하고 가문을 상속받았으며, 이후 막부의 여러 요직을 역임했다. 소샤반, 지샤 부교, 오사카 조다이, 교토 쇼시다이를 거쳐 1760년 로주가 되어 도쿠가와 이에시게 쇼군을 보좌했다. 잦은 전봉을 겪었으며, 1766년 4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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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노우에 마사쓰네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이노우에 마사쓰네 |
한자 표기 | 井上正経 |
출생 | 1725년 |
사망 | 1766년 7월 6일 |
국적 | 일본 |
다른 이름 | 가와치노카미 야마토노카미 |
직업 | 다이묘, 로주 |
관직 및 지위 | |
관위 | 종5위하・가와치노카미, 종4위하・시종, 야마토노카미 |
막부 | 에도 막부소샤반, 지샤부교, 오사카 조다이, 교토 쇼시다이, 로주 |
주군 | 도쿠가와 요시무네 → 도쿠가와 이에시게 → 도쿠가와 이에하루 |
번 | 히타치가사마 번 번주 → 무쓰이와키 다이라 번 번주 → 도토미하마마쓰 번 번주 |
씨족 | 이노우에 씨 |
가족 관계 | |
부모 | 아버지: 이노우에 마사유키, 어머니: 이나바 씨 |
형제자매 | 마사쓰네, 모리 다다히로 정실, 여자 |
배우자 | 센고쿠 마사후사의 딸・마치코 |
자녀 | 마사사다, 마사카타, 마사토키, 아키히메 등 양녀: 오오카 다다요시 정실 |
번주 이력 | |
가사마 번 번주 (이노우에 가문) | 전임: 이노우에 마사유키 후임: 마키노 사다미치 재임 기간: 1737년 ~ 1747년 |
이와키 다이라 번 번주 (이노우에 가문) | 전임: 나이토 마사키 후임: 안도 노부나리 재임 기간: 1747년 ~ 1758년 |
하마마쓰 번 번주 (이노우에 가문) | 전임: 마쓰다이라 스케마사 후임: 이노우에 마사사다 재임 기간: 1758년 ~ 1766년 |
관직 이력 | |
오사카 조다이 | 전임: 마쓰다이라 데루타카 후임: 아오야마 다다토모 재임 기간: 1756년 ~ 1758년 |
교토 쇼시다이 | 전임: 마쓰다이라 데루타카 후임: 아베 마사스케 재임 기간: 1758년 ~ 1760년 |
2. 생애
이노우에 마사쓰네는 히타치국 가사마 번의 다이묘 이노우에 마사유키의 장남으로 태어나, 1737년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와의 공식 알현을 통해 미카와 이노우에 가문의 6대 당주이자 아버지의 사망과 함께 가사마 번의 다이묘로 확정되었다. 1739년에는 종5위하의 관위와 가와치노카미의 칭호를 받았다.
1747년, 마사쓰네는 히타치국에 있는 이와키타이라 번 (3만 7천 고쿠)으로 전봉되었는데, 이는 가사마에서 누렸던 6만 고쿠에 비해 적은 규모였다. 1752년부터 1763년까지 도쿠가와 막부에서 소샤반, 지샤 부교, 오사카 조다이, 교토 쇼시다이, 로주 등의 요직을 역임했다. 1758년에는 도토미국의 하마마츠 번 (6만 고쿠)으로 전봉되었다.
이노우에 마사쓰네는 타지마국 이즈시 번의 다이묘 센고쿠 마사후사의 딸과 결혼했다. 1766년 42세(만 41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그의 뒤는 차남 이노우에 마사사다가 이었다.
- 주요 경력
연도 | 사건 |
---|---|
1725년 (교호 10년) | 출생 |
1737년 (겐분 2년) | 쇼군가 첫 대면, 가독 상속 |
1747년 (엔쿄 4년) | 이와키다이라로 영지 변경 |
1752년 (호레키 2년) | 주자반 |
1753년 (호레키 3년) | 지샤 봉행 (음력 3월 28일) |
1756년 (호레키 6년) | 오사카 성대 (음력 5월 7일) |
1758년 (호레키 8년) | 교토 쇼시다이, 하마마츠로 영지 변경 |
1760년 (호레키 10년) | 로주 (음력 12월 3일) |
1763년 (호레키 13년) | 로주 사임 (음력 3월 13일) |
1766년 (메이와 3년) | 사망, 향년 42세 |
2. 1. 가문 상속과 초기 활동
1725년(교호 10년), 히타치국 가사마 번주 이노우에 마사유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1] 1737년(겐분 2년), 도쿠가와 요시무네 쇼군을 알현하고 가문을 상속받아 가사마 번주가 되었다.[1] 1739년에는 종5위하 가와치노카미에 서임되었다.[1]2. 2. 막부 요직 역임
1747년 이노우에 마사쓰네는 이와키타이라 번(3만 7천 고쿠)으로 전봉되었는데, 이는 가사마 번에서 받았던 6만 고쿠보다 적은 규모로, 사실상 강등이었다.[1]1752년 소샤반(의전 담당)이 되어 도쿠가와 막부의 행정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1753년 음력 3월 28일 지샤부교를 겸임했다.[1] 1756년 음력 5월 7일 오사카 조다이를 역임했고,[1] 같은 해 종4위하로 승진했다.[1]
1758년 교토 쇼시다이 직책을 받았고, 같은 해 하마마츠 번(6만 고쿠)으로 전봉되었다.[1]
1760년 음력 12월 3일 로주가 되어 1763년 음력 3월 13일까지 쇼군 도쿠가와 이에시게를 보좌했다.[1] 1763년 칭호가 야마토노카미로 변경되었다.[1]
2. 3. 사망
1766년(메이와 3년) 42세(만 41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차남 이노우에 마사사다가 뒤를 이었다.[1]3. 관력
4. 가계
항목 | 내용 |
---|---|
아버지 | 이노우에 마사유키 |
어머니 | 이나바 씨(稲葉氏) - 측실 |
정실 | 센고쿠 마치코(千石満子) - 센고쿠 마사후사의 딸 |
차남 | 이노우에 마사사다 |
삼남 | 이노우에 마사카타 |
사남 | 이노우에 마사쓰네 |
장녀 | 데루히메(照姫) - 마쓰다이라 노부아키 정실 |
양녀 | 오카 다다요시 정실 - 혼다 다다요시의 딸 |
5. 평가
이노우에 마사쓰네는 에도 시대 중기에 여러 번 영지를 옮기고 막부의 요직을 두루 거치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특히 오사카 조다이와 교토 쇼시다이를 역임하며 당시 일본의 양대 도시를 관리하는 중요한 직책을 맡았는데, 이는 막부 내에서 상당한 신임을 얻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쇼군을 보좌했던 로주 경력은 그의 정치적 역량을 입증한다.
하지만 잦은 전봉은 그의 정치적 입지가 불안정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1747년 히타치국 이와키타이라 번(3만 7천 석)으로 전봉되었는데, 이는 가사마 번에서 누렸던 6만 석에 비해 크게 줄어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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